양승* 전달
[역자 후기]
붉은 로자도 이제 사라졌다.
그녀의 몸이 쉬는 곳마저 알 수 없으니,
가난한 자들에게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부유한 자들이 그녀를 세상 밖으로 쫓아냈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묘비명 1919」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시(詩)이다. 1980~90년대만 해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학생운동의 지배력이 남아있던 대학 사회에서 익숙한 이름이었다. 각 학과마다 “맑스”, “로자”, “레닌”이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이 한 명쯤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붉은 로자”는 대부분 삶과 사상보다는 “혁명”과 “여성”, “비극적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소비된 아이콘에 가까웠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글을 보면 이런 현상은 서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으나, 어머니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지지자였고 남편이 스파르타쿠스 동맹에 가입한 이력이 있던 한나 아렌트는 로자에게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가졌고, 1966년 J. P. 네틀의 기념비적인 로자 룩셈부르크 전기가 출간되었을 때, 이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그녀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한길사)에 수록)
이 글에 따르면,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은 직후인 1920년대에 독일 사회에서 그녀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폭동을 사주한 극좌 인사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고, 좌파 진영 내부에서도 실패한 인물이라는 인식이 컸다고 한다. 게다가 스탈린주의의 영향력이 강해짐에 따라 그녀가 창건한 독일 공산당 내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력을 지우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이런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루이제 카우츠키 같은 친구들에 의해 개인적인 편지들이 출간되면서,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와 따뜻한 감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런 감성적 접근 속에서 그녀의 사상 자체는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소위 신좌파가 등장할 때마다 룩셈부르크가 소환되었지만, 그 신좌파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버려졌다는 것이다. 독일 사회에서 활동한 여성 엘리트이자 유대인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던 아렌트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부당하게 저평가 받았다고 지적하며, 네틀의 말을 빌려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사상은 세계 어디에서나 가르쳐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렌트가 말한 대로, 유럽과 북미에서 1960년대에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소련식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신좌파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56년 헝가리 봉기 등에서 소련이 보이는 권위적인 모습들은 이른바 “위로부터” 사회주의가 아닌,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나 아렌트가 서평을 쓴 네틀의 방대한 로자 룩셈부르크 전기가 1966년에 나온 것도 이런 관심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아래로부터의 참여, 민주주의와 자율성, 노동자 대중에 대한 신뢰를 일관되게 주장했으며, 대중파업에 관련된 논의들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좌익 사회주의자에게 상당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운동권 내에 공식 마르크스주의(즉, 스탈린주의)에 대한 맹신이 강하게 남아 있던 1980년대 한국에서 레닌을 비판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작은 잘 읽히지 않았다. 군사 독재 체제가 무너진 1987년 이후 그 동안 일본어나 비공식 번역본으로 은밀하게 읽히던 마르크스주의 관련 도서들이 많이 정식 출간되었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의 글은 1989년에 레닌을 비판한 두 편의 논문을 묶은 소책자 한 권이 나온 것이 전부였다. (『러시아 혁명』, 두레, 1989) 스탈린주의에 대한 회의가 널리 확산되던 90년대 초중반에도 그에 대한 대안으로 각광받은 것은 알튀세르주의나 트로츠키주의였지, 로자 룩셈부르크는 아니었다.
1997년 총파업이 일어나면서,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들과 활동가들에게 파업에 대한 관점에 관련하여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 파업론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고, 이런 관심은 2000년대 초에 「개량이냐 혁명이냐」와 「대중파업」을 비롯한 몇 개의 소론을 번역하여 묶은 선집이 『로자 룩셈부르크주의』(풀무질, 2002)라는 이름으로 출간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무렵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적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고 있었다.
영미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저술로 꼽히는 네틀의 전기가 번역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축적』조차 2013년에야 비로소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이후 한 출판사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선집 출간을 추진했지만, 『정치경제학 입문』한 권만 나오고 중단된 것으로 볼 때 아무래도 판매량과 대중적 관심이 저조해서 였을 것이다. 한국에 몇 권의 전기와 서간집이 나와 있지만, 그녀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작은 여전히 드물고, 구할 수 있는 책도 많지 않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케이트 에반스의 그래픽노블 『레드 로자』는 그런 점에서 소중한 시도이지만, 사상의 깊이를 담기에는 다소 아쉬운 측면도 있다.
주변에 이 책을 번역하게 됐다고 이야기했을 때, 필자가 놀란 것은 생각했던 이상으로 로자 룩셈부르크가 한국에 잊혀져 있다는 점이었다. 필자가 만난 젊은 세대의 활동가들 상당수가 그녀의 이름조차 생소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필자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과거에 비극적 낭만성의 아이콘으로 소비되었고, 그마저도 이제 잊혀지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을 한국의 새로운 세대에게 소개하는데, 2020년 미국에서 출간된 다나 밀스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짧고 압축적인 서술과 함께, 이 책은 그 동안 상대적으로 간과 되어 온 소수자로서 룩셈부르크의 삶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기존 전기와 차별성을 가진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던 폴란드 출신이었고, 그 안에서도 박해 받는 소수민족인 유대인이자 여성이었다. 선천적인 고관절 탈구로 인한 장애는 또한 그의 활동에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했다. 이 책이 지적하는 대로, 이런 정체성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와 이론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필자는 유대인, 여성, 장애인으로서 그가 겪은 다양한 차별의 경험을 짚으며, 그런 억압 속에서도 끝까지 보편적인 인류애와 사회 혁명을 주장했던 그의 사상과 실천을 조명한다.
이러한 접근은 좌익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박사를 넘어, 고통 받는 타인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연대했던 인간 로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력을 준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극우 세력이 부상하고 오늘날 그녀와 같은 소수자의 경험이 어떻게 보편적인 사회 혁명의 요구와 연결될 수 있는 지에 대한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주의를 끝내 거부한 교조주의자라는 인식과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은 당대에 이단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주요한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레닌은 『자본의 축적』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아마도 룩셈부르크가 『자본의 축적』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서 암묵적으로 배제되고 있었던 “수탈” 개념을 다시 제기한 데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착취와 수탈을 구분하고, 특히 제조업 현장에서 비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착취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소위 “본원적 축적” 외에는 수탈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도 명확히 규정하지도 않았다. 이런 이론적 강조는 대공업의 남성 노동자들을 자본주의에 맞서는 주체로 특권화 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제국주의와 가사노동에 대한 이론적인 공백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최근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비마르크스의자들을 막론하고 진보적 경제 이론에서 자본주의의 수탈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제이론을 사실상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하비를 비롯해, 많은 이론가들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수탈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 제시한 것처럼 대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폭력성을 분석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심각한 문제, 즉 자연, 여성, 약소국 등에 대한 끊임없는 수탈을 이해하고 비판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름만 낭만적으로 소비되었던 혁명가를 넘어, 그의 삶과 사상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은 21세기 한국 사회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뜻밖의 지혜를 선사할지도 모른다. 이 책의 원서는 인용, 출처, 인명 등에서 크고 작은 오류들을 몇 가지 갖고 있는데, 번역 과정에서 대부분 교정했다.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그밖에 오류에 대한 책임은 모두 역자에게 있다.
(난권옹 페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