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주시 관덕로 16-1 (삼도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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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교회는 1908년 개신교 목사로는 처음 제주에 파견된 조선예수교 장로회 소속 이기풍(李基豊) 목사가 세웠다. 이기풍 목사는 처음에는 칠성통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전도를 시작했다가 김행권의 집에서 기도회를 갖게 되었다.
그 후 일도리에 있던 초가집 두 채를 사들여 교당으로 사용하다가 1910년 삼도리에 있던 출신청(出身廳) 건물을 사들여 성내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1915년 이기풍 목사는 조선총독부에 교회 설립 신고를 하였으며, 교회 신도가 늘어남에 따라 제주 동부교회를 설립하면서 성내교회는 제주서부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53년 장로교단 분열 과정에서 성내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이 됨에 따라 신자들도 제주서부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파)와 성안교회(예수교장로회통합)로 분리되었다.
1994년 제주서부교회는 원래 이름인 성내교회로 명칭을 환원하였다. 2004년 9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성내교회를 역사 유적지 교회로 지정하였다.
제주중앙성당은 제주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1899년 4월 22일에 설립되었습니다.
제주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알려진 것은 1801년 정난주(마리아, 아명 정명련)가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면서부터입니다.
1845년에는 김대건(안드레아) 성인이 제주 앞바다에 표착하고 1858년에는 함덕 출신의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이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전교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김기량은 이후 육지를 오가며 성사를 받았고, ‘제주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여 제주 신앙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기량은 1866년 체포되어 경상도 통영에서 순교하고 그로부터 교리를 배워 예비 신자가 된 김이라는 사람은 박해를 피해 살아났으나 189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제주 지역에 복음이 다시 전파된 것은 제주 중문 색달리 출신인 양용항(베드로)과 이 라우렌시오가 육지를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이들은 1898년 4월경에 세례를 받고 제주로 돌아와 신 아우구스티노와 바오로 형제, 김생원 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주 최초의 청년복합몰로 동문수산시장 6번 게이트 입구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주향교가 있던 자리로 예전에 ‘생깃골’이라 불리던 자리에 그 옛날 제주향교가 인재를 키워냈던 것처럼 제주의 청년 인재를 육성하고 청년들의 생기가 팔딱이길 기대한다는 의미에서 생기발랄로 명칭하였다. 1층에는 제주다움을 보여주는 소품샵과 제주특산물, 감귤 디저트와 키즈옷가게 그리고 멋그러운 한복가게가, 2층에는 푸드코트 9개 점포가 들어서 있으며, 3층에는 온라인 판매 점포 1개소 이외에 회의실, 공유오피스 등 청년상인 인큐베이팅 공간이 들어서 있다.
산지천갤러리는 옛 여관 건물(구.금성장, 녹수장) 두 동을 연결하는 리모델링을 통해 조성된 전문 전시공간이다.
1층에서는 워크숍, 교육프로그램 등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공간이며, 2층부터 3층까지는 다양한 예술장르를 기반으로 한 기획전시, 4층은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표적인 작가 김수남의 상설전시가 운영된다.
문화예술 향유와 더불어 공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전 건물의 흔적을 통해 원도심의 옛 기억과 풍경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관덕정은 제주의 현존 건축물 중에 가장 오래된 관아 건물로 1448년(세종30년)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주목사 신숙청이 지 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덕’이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건물로 창호문 없이 사방이 트인 정자 형태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현재 관덕정 마당과 제주목 관아에서 입춘굿놀이 등이 행하여지면서 문화예술의 공연장소로서도 이름나 있다.
관덕정은 창건 이후에는 병사의 훈련 뿐만 아니라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군마 점검지, 잔치를 베푸는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때로는 죄인을 다스리는 형장으로도 이용되었다.
보물제32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관덕정에는 ‘관덕정(觀德亭)’ 편액을 비롯하여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탐라형승(耽羅形勝) 등 세개의 현판 글씨가 걸려있고 대들보에는 십장생도, 적벽대첩도, 대수렵도 등 격조 높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때 제주지방을 다스리던 지방관아로 제주목 관아가 건립되기 이전부터 이곳에는 이미 탐라국시대의 성주청 등 주요 관아 시설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435년(세종17년)에 고득종이 쓴 『홍화각기(弘化閣記)에는 제주목 관아 시설은 총 58동 206칸 규모였다고 전한다. 관덕정을 포함하여 제주목사의 집무처인 연희각, 판관의 집무처인 찰미헌, 절제사의 집무처인 홍화각, 연회를 열던 우련당, 군관들이 근무하던 영주협당, 제주목사가 시를 지으며 여유를 즐기던 귤림당, 당시로서는 유일한 2층 누각인 망경루 등이 있었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에 걸쳐 이뤄진 발굴조사와 『탐라순력도』, 「탐라방영총람」의 관아 배치 그림과 도면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까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과거 관아의 외대문인 진해루는 2층 누각 건물로 2층에 종을 매달아 새벽과 저녁 시간에 종을 쳐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제주목 관아 내에는 공물로 바치는 귤의 모자란 수량을 채우기 위해 귤림을 조성하였다. 귤림 안에 있는 정자란 뜻으로 ‘귤림당’이라 하며, 귤이 익어갈 무렵 성에 올라 내려다보면 사방이 금빛으로 물든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귤림추색(橘林秋色)’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