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0년 제주목사 신숙청이 지은 건물로 소재지가 용담1동은 아니지만 역사문화탐방의 시작지로 선정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가 제주의 중심지로 중앙파출소, 제주경찰서, 경찰국, 지방법원, 검찰청 등 있었다.
Contents
역사문화탐방길

1
“관덕정”

원래 무근성은 병문천과 해자길, 구린질 사이 일대 삼각형 형태의 마을을 일컫는다.
과거 관아에 근무하는 관리(조관)들과 부호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이며, 무근성(묵은성)은 탐라국시대(5~6세기 전후) 때 성이 있었으나, 제주읍성이 새로 생기면서 없어진 오래된 성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하다.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확실한 자료도 없으니 그저 추측만 하고 있다.
1750년에 발간된 ‘해동지도 제주 삼현도’에 보면 제주읍성 아래 진성(陳城)이라는 지명표기가 나온는데, 이곳이 무근성이다.
진(陳)은 베풀다의 뜻도 있지만 묵다(오래되다)의 뜻도 있으니 지명을 한자표기 한 것이다.



4
배고픈다리터

과거 배고픈다리가 있었던 장소로 병문천을 복개하며 같이 사라졌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다리를 세우고 그 밑에 파이프 같은 것을 놔서 물이흐르도록 한 다리로,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다리가 잠겨 통행이 불가능 했다. 배고픈다리는 다리의 중간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배가 고픈 것처럼 보여 배고픈다리라 불린다.
지금의 서문교는 복개되었지만 과거 일제가 1910년대에 신작로를 내면서 폭 5미터의 다리를 놓았는데 그 다리가 생기기 이전에 아마도 병문천을 건너던 배고픈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다리를 건너면 향교를 향하던 길과 용담 부러리 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가는 한질(한길, 큰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다리를 세우고 그 밑에 파이프 같은 것을 놔서 물이흐르도록 한 다리로,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다리가 잠겨 통행이 불가능 했다. 배고픈다리는 다리의 중간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배가 고픈 것처럼 보여 배고픈다리라 불린다.
지금의 서문교는 복개되었지만 과거 일제가 1910년대에 신작로를 내면서 폭 5미터의 다리를 놓았는데 그 다리가 생기기 이전에 아마도 병문천을 건너던 배고픈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다리를 건너면 향교를 향하던 길과 용담 부러리 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가는 한질(한길, 큰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6
동한두기

제주시 동한두기길 3-9번지 일원으로 용담에 가장 먼저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알려진 한두기는 한천의 하류가 바다와 만나는 곳을 말한다.
동네가 마치 큰 항아리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한독’(大甕.大獨)이라고 하다가 ‘한두기’라고 변하였다.
한두기는 용연을 중심으로 동쪽을 ‘동한두기’, 서쪽을 ‘서한두기’라 하며 줄다리를 건너기 전은 용담2동 서한두기, 건너는 순간 용담1동 동한두기 이다.
‘한두기’는 한내의 하류가 땅이 낮아 큰물이 있을 때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둑을 쌓았기 때문에 ‘한둑’이라 했고, 예전에는 ‘대독포[大甕浦]’라 썼다.
동네가 마치 큰 항아리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한독’(大甕.大獨)이라고 하다가 ‘한두기’라고 변하였다.
한두기는 용연을 중심으로 동쪽을 ‘동한두기’, 서쪽을 ‘서한두기’라 하며 줄다리를 건너기 전은 용담2동 서한두기, 건너는 순간 용담1동 동한두기 이다.
‘한두기’는 한내의 하류가 땅이 낮아 큰물이 있을 때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둑을 쌓았기 때문에 ‘한둑’이라 했고, 예전에는 ‘대독포[大甕浦]’라 썼다.

8
버랭이깍 (벌랑포)

병문천이 바다로 흘러드는 포구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버랭이깍’이라 불렀다. 버랭이깍은 지금의 제주시 삼도동과 용담1동의 자연마을인 동한두기에 있었던 부러릿개를 두고 이른 말이며, 당시 벌랑(伐浪)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었다.
「제주삼현도」에서는 병문 내 하류에 벌랑포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 내를 부러릿내라 하였으며, 그 하류에 있던 포구를 부러릿개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장사꾼들이 버랭이깍에 배를 대며 옹기를 팔았다. 또한 썰물과 밀물의 조차가 큰 하구의 특성을 이용하여 멜(멸치)을 잡거나 아이들이 놀이터로 이용하였다.
「제주삼현도」에서는 병문 내 하류에 벌랑포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 내를 부러릿내라 하였으며, 그 하류에 있던 포구를 부러릿개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장사꾼들이 버랭이깍에 배를 대며 옹기를 팔았다. 또한 썰물과 밀물의 조차가 큰 하구의 특성을 이용하여 멜(멸치)을 잡거나 아이들이 놀이터로 이용하였다.

9
서자복

서쪽에는 서자복이 있고 동쪽에는 옛날 건입동에, 동자복이 마주 보게 지었다고한다.
원도심 개발 전 건물들이 지어지기 이전에는 제주 성안까지 다 보이고, 동자복과 마주보며 성안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겼다.
서자복은 제주시 용담동 해륜사지 옛터(제주시 동한두기길 7-6, 현재 용화사)에 보존되어 있는 미륵으로, ‘복신미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옛 제주성의 서쪽에 성안을 수호하듯 세워져 있었다.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의 불상이 토속적으로 변모하는 과정 중의 한 양상인 것으로 보아 고려 후 기로 추정되며, 머리에 씌워진 대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의 벙거지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자복은 신장 273㎝, 얼굴 길이 135㎝, 신부 길이 138㎝, 신부 둘레 315㎝, 기단 높이 66㎝, 기단 둘레 335㎝, 감투 둘레 135㎝이며. 제주산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고 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의 벙거지를 쓴 입상이다.
기단 위의 석상은 하체가 없고 양손은 가지런히 펴 가슴에 대고 있으며, 움츠려 있는 듯한 귀, 뚜렷한 입술, 옆으로 길게 감은 듯한 눈, 둥근형의 머리 부위 등 전체적인 인상은 자비롭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법의는 통견이지만 목과 어깨 부분에서 하단부까지 앞이 터진 도포 같은 것을 입고 있는데, 문양 표현이 없는 등 토속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도심 개발 전 건물들이 지어지기 이전에는 제주 성안까지 다 보이고, 동자복과 마주보며 성안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겼다.
서자복은 제주시 용담동 해륜사지 옛터(제주시 동한두기길 7-6, 현재 용화사)에 보존되어 있는 미륵으로, ‘복신미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옛 제주성의 서쪽에 성안을 수호하듯 세워져 있었다.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의 불상이 토속적으로 변모하는 과정 중의 한 양상인 것으로 보아 고려 후 기로 추정되며, 머리에 씌워진 대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의 벙거지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자복은 신장 273㎝, 얼굴 길이 135㎝, 신부 길이 138㎝, 신부 둘레 315㎝, 기단 높이 66㎝, 기단 둘레 335㎝, 감투 둘레 135㎝이며. 제주산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고 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의 벙거지를 쓴 입상이다.
기단 위의 석상은 하체가 없고 양손은 가지런히 펴 가슴에 대고 있으며, 움츠려 있는 듯한 귀, 뚜렷한 입술, 옆으로 길게 감은 듯한 눈, 둥근형의 머리 부위 등 전체적인 인상은 자비롭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법의는 통견이지만 목과 어깨 부분에서 하단부까지 앞이 터진 도포 같은 것을 입고 있는데, 문양 표현이 없는 등 토속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남근석
서자복 옆에는 높이 70㎝, 둘레 100㎝의 남근을 상징하는 동자불이라는 작은 석상이 있는데, 여기에 걸터앉아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왔다. 또한 서자복은 전염병과 같은 질병도 잘 막아주는 것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해륜사

제주시 용담동 동한두기의 절동산이라는 언덕에 있는 서자복의자리는 고려 때 해륜사, 일명 서자복사라는 사찰이 있었던곳으로, 18세기 중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경에용화사라는 사찰이 세워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서자복은 용화사 경내에 놓여 있다. 서자복은 서미륵이라 부르기도 한다.
1910년경에용화사라는 사찰이 세워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서자복은 용화사 경내에 놓여 있다. 서자복은 서미륵이라 부르기도 한다.

10
용연구름다리

다소 위험하게 출렁이던 작은 구름다리를 철거하고 새로만든 구름다리이다. 용연 구름다리는 동한두기와 서한두기를 잇는 다리인데 용연 위에 너비 2.2m, 길이 42m의 현수교 형태로 주탑 6m 기둥 4개에 와이어로 연결하여 출렁거리는 구름다리로 가설되어 있다.
용연

제주시 용담1동 2581-4에 위치하며 제주시 서쪽 해안 용두암(龍頭岩)에서 동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있는 한천(漢川)의 하류지역으로, 높이 7~8m의 기암 계곡이며, 바다와 이어져 있네. 옛날 용의 놀이터였다는 전설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주십이경’의 하나인 ‘용연야범’의 장소이며 ‘용연’의 계곡물은 산등성이부터 바닷가로 흐르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용연 다리에서는 정자와 어우러져있는 계곡의 절경을 구경할 수 있다.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데, 용연에 살고 있는 용이 승천하여 이 곳 만큼은 비를 내리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용이 놀던 자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오색 물결 빛이 아름답고 울창한 숲과 조화를 이룬 절벽과 물속의 바위들의 모습이 수려하다. 또한, 선인들이 풍류를 즐긴 장소로 유명하며 마애각이 절벽에 새겨져 있고 용연야범축제가 매해 열리는 곳이다.
‘영주십이경’의 하나인 ‘용연야범’의 장소이며 ‘용연’의 계곡물은 산등성이부터 바닷가로 흐르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용연 다리에서는 정자와 어우러져있는 계곡의 절경을 구경할 수 있다.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데, 용연에 살고 있는 용이 승천하여 이 곳 만큼은 비를 내리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용이 놀던 자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오색 물결 빛이 아름답고 울창한 숲과 조화를 이룬 절벽과 물속의 바위들의 모습이 수려하다. 또한, 선인들이 풍류를 즐긴 장소로 유명하며 마애각이 절벽에 새겨져 있고 용연야범축제가 매해 열리는 곳이다.

12
고시락당

고시락당은 한두기 마을 본향당으로 용연 다리가 있는 곳에서 100여m 떨어진 용연 냇가 인적이 드문 곳에 있다.
당신인 ‘용해국대부인’은 목사의 뱃고사를 받아먹고 어부와 잠녀의 소망을 이루어 준다고 해서 용담동 한두기 주민들이 생기에 맞춰 택일하여 다니는데 당에 갈 때에는 메 네 그릇을 뜨고 간다.
이는 용해국대부인의 신위수가 넷임을 뜻한다.
당은 5평 정도로 규모는 작으나 용연 오솔길 옆 암벽 위에 있어 신목과 신석, 그리고 지전물색들이 서로 어울려 분위기를 신비롭게 만든다.
이 당의 본향당신은 생산·물고·호적을 차지한 신이기도 하지만, 해신(海神)이기도 해서 일만의 어부와 일만의 잠수부를 차지하여 어로의 풍요를 가져다준다.
때문에 이 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용왕제를 하고 제를 드린 후에 이곳에 와서 바다의 안녕을 빈다.
당신인 ‘용해국대부인’은 목사의 뱃고사를 받아먹고 어부와 잠녀의 소망을 이루어 준다고 해서 용담동 한두기 주민들이 생기에 맞춰 택일하여 다니는데 당에 갈 때에는 메 네 그릇을 뜨고 간다.
이는 용해국대부인의 신위수가 넷임을 뜻한다.
당은 5평 정도로 규모는 작으나 용연 오솔길 옆 암벽 위에 있어 신목과 신석, 그리고 지전물색들이 서로 어울려 분위기를 신비롭게 만든다.
이 당의 본향당신은 생산·물고·호적을 차지한 신이기도 하지만, 해신(海神)이기도 해서 일만의 어부와 일만의 잠수부를 차지하여 어로의 풍요를 가져다준다.
때문에 이 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용왕제를 하고 제를 드린 후에 이곳에 와서 바다의 안녕을 빈다.

13
용담동 제사유적

이곳은 탐라시대 제주바다를 무사히 건너기 위해 항해(航海)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유적(祭祀遺蹟)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1993년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수백 점의 통일신라시대의 회색도기병과 항아리 파편을 비롯, 청동제 유물과 철제 화살촉·파상밀집대호·금동제허리띠 장식·유리옥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출토된 유물 중 회색도기, 금동제허리띠장식, 유리옥 등은 탐라국에서는 자체 생산이 되지 않던 유물이다.
이는 원거리 항해와 관련된 제사유적으로 탐라국에서 배를 떠나보낼 때 항해의 안녕을 비는 제사 행위가 행해졌음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이기도 하다.
이 유적의 중심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9세기에 해당된다.
1993년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수백 점의 통일신라시대의 회색도기병과 항아리 파편을 비롯, 청동제 유물과 철제 화살촉·파상밀집대호·금동제허리띠 장식·유리옥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출토된 유물 중 회색도기, 금동제허리띠장식, 유리옥 등은 탐라국에서는 자체 생산이 되지 않던 유물이다.
이는 원거리 항해와 관련된 제사유적으로 탐라국에서 배를 떠나보낼 때 항해의 안녕을 비는 제사 행위가 행해졌음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이기도 하다.
이 유적의 중심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9세기에 해당된다.




14
제주향교

관덕정을 지나 용담로터리 쪽으로 가다보면 길 오른편에 제주향교(제주시 서문로 43번지)가 있다.
30,248㎡ 면적에 후원에는 30여 그루의 장송이 우거져 있고, 향교 안에는 명륜당·대성전·계성사(啓聖祠)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1971년 8월 26일 제주도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 되었으며, 제주향교 대성전은 2016년 6월 13일 보물 제1902호로 지정되었다.
향교재단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제주민을 교육ㆍ교화하고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ㆍ배향하기 위하여 1392년(태조 원년) 제주성 교동(校洞)에 창건하였네. 그 뒤1435년(세종 17) 안무사 최해산(崔海山) 이 중건하였고 1466년(세조 12) 절제사 이유의(李由義)가 중수하였으며, 1536년(중종 31) 목사 심연원(沈連源)이 명륜당을 개축하고 향학당을 건립하였다.
30,248㎡ 면적에 후원에는 30여 그루의 장송이 우거져 있고, 향교 안에는 명륜당·대성전·계성사(啓聖祠)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1971년 8월 26일 제주도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 되었으며, 제주향교 대성전은 2016년 6월 13일 보물 제1902호로 지정되었다.
향교재단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제주민을 교육ㆍ교화하고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ㆍ배향하기 위하여 1392년(태조 원년) 제주성 교동(校洞)에 창건하였네. 그 뒤1435년(세종 17) 안무사 최해산(崔海山) 이 중건하였고 1466년(세조 12) 절제사 이유의(李由義)가 중수하였으며, 1536년(중종 31) 목사 심연원(沈連源)이 명륜당을 개축하고 향학당을 건립하였다.
생굣길(향교길)


목사가 향교 대성전에 제를 지내러갈 때 이 길을 통해서 갔다고 (지도에 청색으로 표시된 길) 한다.
병문내를 건너 향교로 향하던 이 길은 신작로가 나고 도로가 확장 되면서 일부가 없어졌지만 비룡못 아래에서부터는 남아 있다.
생굣질 서쪽 끝에는 현재 제주중학교 담벼락으로 막혀 있으며 이곳이 예전엔 향교의 정문 자리이다.
제주중학교 교정은 예전 향교의 명륜당터이며 제주의 유림들이 명륜당터에 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 자리 앞 길은 다른 옛길과 달리 상대적으로 공간이 넓다.
관덕정 앞길처럼 사다리꼴 형태의 공간이지만 지금은 학교의 담벼락만 차갑게 서 있을 뿐 이정표도 없고 자료를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병문내를 건너 향교로 향하던 이 길은 신작로가 나고 도로가 확장 되면서 일부가 없어졌지만 비룡못 아래에서부터는 남아 있다.
생굣질 서쪽 끝에는 현재 제주중학교 담벼락으로 막혀 있으며 이곳이 예전엔 향교의 정문 자리이다.
제주중학교 교정은 예전 향교의 명륜당터이며 제주의 유림들이 명륜당터에 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 자리 앞 길은 다른 옛길과 달리 상대적으로 공간이 넓다.
관덕정 앞길처럼 사다리꼴 형태의 공간이지만 지금은 학교의 담벼락만 차갑게 서 있을 뿐 이정표도 없고 자료를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17
서문공설시장

제주시 서문로 4길 13-2번지 일원으로 부지면적 1,904㎡, 매장면적 1,636㎡이며, 점포수는 82개이다.
시장 건물은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주상 복합건물로, 그중 1~2층은 상가, 3~4층은 주거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층에는 음식점ㆍ잡화점ㆍ과일가게 등 점포 44개, 2층에는 옷가게와 포목점 등 점포 38개가 있으며, 건물 밖으로 차양막 시설이 설치된 공간에 간이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주요 거래품목은 농ㆍ축산물과 의류ㆍ포목ㆍ잡화로, 식당도 여럿이 있다.
1954년 11월 16일 서문시장이란 이름으로 개장하였으며, 개장 당시 부지면적은 2,700m², 점포수는 212개였다. 1960년대에는 시외버스터미널이 근처에 있어 제주도 서부지역 도민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며, 삼담파출소 남쪽과 적십자회관 사이에 5일장이 서고, 제주중학교 서쪽 일대에 일명 도깨비시장(현 동룡상가)이 형성되어 세 시장 간의 상호 연계성으로 인해 활기를 띄었었다.
하지만 1967년 12월 시외버스터미널이 이전하고, 1971년 7월 현 오현고등학교 자리에 중앙종합매일 시장이 들어서면서 시장의 상권이 조금씩 분산되기 시작했고, 특히 대표적인 고객이었던 제주대학교ㆍ제주상고ㆍ제주시청ㆍ제주경찰서ㆍ소방서ㆍ법원ㆍ경찰청ㆍ제주전문대학(현 제주산업정보대학)ㆍ전신전화국 등 학교와 관공서들이 대거 이전하면서 판매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욱이 1990년대 중반부터는 반경 500m 내에 마트와 지하상가 등 대형 상권이 들어서면서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에 제주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서문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사업비 37억 6,800만 원을 투여하여 시장 현대화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95년 12월 노후된 시장 건물의 재건축사업을 착공하여 1997년 6월 새 건물을 준공하고, 1998년 10월 재개장하였으며 재개장과 함께 서문공설시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시장 건물은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주상 복합건물로, 그중 1~2층은 상가, 3~4층은 주거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층에는 음식점ㆍ잡화점ㆍ과일가게 등 점포 44개, 2층에는 옷가게와 포목점 등 점포 38개가 있으며, 건물 밖으로 차양막 시설이 설치된 공간에 간이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주요 거래품목은 농ㆍ축산물과 의류ㆍ포목ㆍ잡화로, 식당도 여럿이 있다.
1954년 11월 16일 서문시장이란 이름으로 개장하였으며, 개장 당시 부지면적은 2,700m², 점포수는 212개였다. 1960년대에는 시외버스터미널이 근처에 있어 제주도 서부지역 도민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며, 삼담파출소 남쪽과 적십자회관 사이에 5일장이 서고, 제주중학교 서쪽 일대에 일명 도깨비시장(현 동룡상가)이 형성되어 세 시장 간의 상호 연계성으로 인해 활기를 띄었었다.
하지만 1967년 12월 시외버스터미널이 이전하고, 1971년 7월 현 오현고등학교 자리에 중앙종합매일 시장이 들어서면서 시장의 상권이 조금씩 분산되기 시작했고, 특히 대표적인 고객이었던 제주대학교ㆍ제주상고ㆍ제주시청ㆍ제주경찰서ㆍ소방서ㆍ법원ㆍ경찰청ㆍ제주전문대학(현 제주산업정보대학)ㆍ전신전화국 등 학교와 관공서들이 대거 이전하면서 판매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욱이 1990년대 중반부터는 반경 500m 내에 마트와 지하상가 등 대형 상권이 들어서면서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에 제주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서문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사업비 37억 6,800만 원을 투여하여 시장 현대화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95년 12월 노후된 시장 건물의 재건축사업을 착공하여 1997년 6월 새 건물을 준공하고, 1998년 10월 재개장하였으며 재개장과 함께 서문공설시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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