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0년 제주목사 신숙청이 지은 건물로 소재지가 용담1동은 아니지만 역사문화탐방의 시작지로 선정하였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가 제주의 중심지로 중앙파출소, 제주경찰서, 경찰국, 지방법원, 검찰청 등 있었다.
원래 무근성은 병문천과 해자길, 구린질 사이 일대 삼각형 형태의 마을을 일컫는다. 과거 관아에 근무하는 관리(조관)들과 부호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이며, 무근성(묵은성)은 탐라국시대(5~6세기 전후) 때 성이 있었으나, 제주읍성이 새로 생기면서 없어진 오래된 성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하다.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확실한 자료도 없으니 그저 추측만 하고 있다. 1750년에 발간된 ‘해동지도 제주 삼현도’에 보면 제주읍성 아래 진성(陳城)이라는 지명표기가 나온는데, 이곳이 무근성이다. 진(陳)은 베풀다의 뜻도 있지만 묵다(오래되다)의 뜻도 있으니 지명을 한자표기 한 것이다.
창성 이용원을 중심으로 서쪽 일대에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조관(朝官) 집터라 하였다. 6·25때에는 피란 온 난민들이 거주하기도 했으며, 조관집터 서쪽에서 병문천 사이 일대가 제주의 부호인 강만호 집안의 집터이다.
강만호 집안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 조관집터 동쪽에 있다. 만호(萬戶)라는 명칭은 고려 때 몽골식 직제로서 다스리는 호수(戶)에 의한 관리직제였으나 후대로 오면서 다스리는 가옥의 수가 아닌 직급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주로 변방의 요지를 담당하는 무장에게 주어진 직급인데 일반 고을에서는 수령이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였으나 변방 등 군사적 요충지에는 별도로 만호 계급의 무장이 파견되었고 과거 탐라시대 고씨, 강씨 성을 가진 만호가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장소이다.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다 하여 갈마수, 가막소이라 불렀고 한두기 마을의 근원이 되었다. 물이 시원하고 좋아서 옛날에 식수로 사용하거나, 빨래나 목욕을 하기도 하였으며 현재 용천수 목욕탕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소 위험하게 출렁이던 작은 구름다리를 철거하고 새로만든 구름다리이다. 용연 구름다리는 동한두기와 서한두기를 잇는 다리인데 용연 위에 너비 2.2m, 길이 42m의 현수교 형태로 주탑 6m 기둥 4개에 와이어로 연결하여 출렁거리는 구름다리로 가설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