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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소개

삼성혈 사진

태고시 고을나(高乙那), 양을나(梁乙那), 부을나(夫乙那) 삼신중의 양을나(梁乙那)의 양기(梁琪)와 양유침(梁有琛)의 거소로서 당시 가락천변(加樂川邊)에 있는 가령촌(嘉嶺村)을 중심으로 이도(二 徒)라 칭한데서 연유되었으며, 중앙로타리∼남문로타리∼광양로타리를 잇는 상가 및 교통문화의 중심지이며 삼성혈, 제주성지 및 오현단이 위치해 있어 유서 깊고 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동 입니다.

이도1동은 1955년 8월 13일 시제실시에 따라 이도리의 일부인 '모흥골', '오현단', '두목골', '세병 골', '검정목골'을 갈라서 이도1동회가 되었다. 이도1동은 서쪽으로는 남문 한길 동쪽이며 동쪽으 로는 '가락쿳내' 서쪽이 된다. 남쪽으로는 광양로를 경계로 하며 북쪽으로는 관덕로를 경계로 한 다. 중앙로가 개설되면서 옛날의 지명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지만, 촌로들의 말을 종합하면 삼성혈 주변의 마을 '모흥골', 중앙로 중간 지점 동서로 난 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 '두목 골', 관음사 포교당 남쪽 골목길이 동서로 이루어진 '생깃골', 중앙로에서 구 남양방송(지금은 남 양슈퍼)앞까지 이어진 골목 주변 마을인 '세병골', 오현단 서쪽에 있었던 '항골', '항골'에서 중앙 로 건너 '통물'이 있었던 만수당 약국에서 '남문골'로 이어지는 '물항골' 등의 마을이 이도1동 지 역을 이룬다.

주요사적지 현황

삼성혈

사적 제134호. 면적 약 25,878㎡. 모흥혈(毛興穴)이라고도 한다.

제주도 원주민의 발상지로, 전설에 의하면 탐라국(耽羅國)의 시조 고을나(高乙那)·양을나(梁乙那)·부을나(夫乙那)의 3신인(神人)이 솟아났다는 곳이다. 소규모의 구멍들이 평지에 각각 수 m의 간격을 두고 삼각형을 이루며, 위쪽 구멍은 고을나, 왼쪽 구멍은 양을나, 오른쪽 구멍은 부을나가 솟아난 곳이다. 현재 잔디로 덮여 있어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삼성혈은 조선시대 1526년(중종 21)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돌울타리를 쌓고 혈(穴) 북쪽에 홍문(紅門)·혈비(穴碑)를 세워 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함으로써 성역화되었다. 1698년(숙종 24) 혈 동쪽에 삼을나묘(三乙那廟:지금의 三姓殿)를, 1827년(순조 27) 전사청(奠祀廳)을, 1849년(헌종 15) 숭보당(崇報堂)을 세웠다. 그 밖에 석비(石碑)가 인접된 곳에 있다. 1996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4월과 10월 삼성전에서 춘추제(春秋祭)를 지내고 매년 12월 10일 혈단에서 건시제(乾始祭)를 지낸다.

오현단

1971년 8월 26일 제주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제주시 이도1동에 제주성지의 흔적이 있는데 그 북쪽에 바로 인접하여 오현단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발전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배향한 옛 터이다. 오현(五賢)은 1520년(중종 15)에 유배된 충암 김정, 1534년에 목사(牧使)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34)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金尙憲), 1614년(광해군 6)에 유배된 동계 정온과 1689년(숙종 15)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이다.

단은 원래 1578년(선조 11) 임진(林晋)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趙仁俊)이 가락천 동쪽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였다. 1665년(현종 6) 이중신(李重信)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최진남(崔鎭南)이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 짓고, 이를 사(祠)로 하고 장수당을 재로 하여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 현액하였다. 1682년(숙종 8) 신경윤(愼景尹)이 절제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安建之)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4현을 봉향하다가 1695년에 이익태(李益泰) 절제사 때 송시열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그뒤 1850년(철종 1) 장인식 목사는 귤림서원 묘정비를 세웠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전국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에 따라 1665년 최진남 판관이 세운 귤림서원이 철폐된 후, 1892년 제주의 김의정(金義正)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단내에는 5현의 유적으로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의 조두석이 있는데 각자 33∼35cm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또한 오현단 서쪽 병풍바위에 1856년(철종 7) 판관 홍경섭(洪敬燮)이 새긴 송시열의 필적 마애명(磨崖銘)인 ‘증주벽립(曾朱壁立)’과 김정과 송시열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제주성지

1971년 8월 26일 제주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제주시에서 소유하고 있다. 제주성은 탐라국 수부(首府)의 성곽으로 축성되었으나, 원래의 규모와 축성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고려 숙종 때 이 지방의 많은 화산암을 이용하여 둘레 4,700척(약 1,424m), 높이 11척(약 3.3m)으로 확장·축조하였다. 조선시대의 《태종실록》에 “태종 11년(1411) 정월에 제주성 수축(修築)을 명하였다”라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성 둘레는 910보”라고 기록되어 있다.

1510년(중종 5) 3포에서 일본인 거류민들이 일으킨 삼포왜란 후 1512년에 그 뒷수습책의 일환으로 목사 김석철(金錫哲)이 둘레 5,486척(약 1,662m)으로 확장하고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이때 성안에 샘이 없어 별도로 중성(重城)을 쌓아 급수하도록 하였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는 왜선이 침범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목사 성윤문(成允文)은 성벽을 5척(약 1.5m) 더 높여 쌓고, 포루(砲樓)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1780년(정조 4)에는 목사 김영수(金永綬)가 산 아래 하천 주변과 그밖의 하천 주변에 익성(翼成)과 보(堡)를 쌓았으며, 이후 계속 수축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5∼1928년에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성벽을 헐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여, 지금은 오현단 부근의 격대 3개와 길이 85.1m, 높이 3.6∼4.3m의 성벽만 남아 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격대 중 2개는 옛 조상들의 축성법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도1동 향토지 집필사업 최종보고서

본 자료는 현재 초안 작성된 자료로 추가 자료 조사 및 수집, 주민공람과정을 거쳐 수정 사항 등을 반영하여 최종적으로 확정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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